우리들 각각의 기억 속에는 학창 시절의 수업을 인상 깊게 만들었던 몇몇 선생님들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개인적인 얘기가 되겠으나, 내게도 그런 인상의 몇 분 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중학교 1학년 때 사회과 선생님이셨는데 손바닥만한 대나무 쪽에 작은 나무토막을 덧붙여 꼭 칫솔처럼 만들어 두고 수업 시간 중 끊임없이 각성과 자각이 일어나도록 자극을 주셨더랬다.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여러 명의 손바닥이 얼얼한 상태가 되어 있었지.
이분 얘기하기가 쉽지 않으니, 잠깐 곁길로 가야만 한다. 나 혼자서 연애를 했던 이 분은 키도 작고 얼굴도 미인형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교사로서 여겨졌던-데다가 내 사춘기의 여 선생님이었던- 첫 선생님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분이 여름 지나고 결혼을 하셨는데, 별 아쉬움이나 슬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3000원이란 큰돈을 학교 앞 문방구에 안겨 주고 구입했던(명백히 바가지 썼던 거다. - -;; .....) 앨범에 일주일 넘도록 사진 대신 시들을 끼워 넣는 작업을 해서 헌정 시집을 만들어 드렸던 거다. 내 마누라에게도 해 보지 못한 청춘이었던 게지. 그때가..... 거기 들어간 시들은 모두 내가 직접 쓴 것들이었는데, 찾을 수도 없다. ㅠ ㅠ
다른 한 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과목 선생님이셨다. 그 분은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셨는지 수업 시간 중 삽화든, 본문 구절이든 몇 쪽 몇째 줄을 펴 봐라 하시면서 종횡으로 교과서를 넘나드셨다. 하필 교훈이 ‘하면 된다, 하자, 할 수 있다’ 이런 것이었던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그 분은 우리도 그렇게 교과서를 암기해 두길 권하셨다. 그때는 사전이란 으레 한 장씩 떼어 씹어 먹는 걸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내 기억력은 고약하기로 유명한 편인데, 대개 사람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들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름 못 외워 전화 번호도 몇 번 듣는다고 새겨지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 고생했을 것은 불문가지.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는 입시 공부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고생은 크지 않았다. 어쩄든 이분에게 배운 게 있기에 뒤늦은 공부에서 뒷심 발휘가 가능했다.
대학에 와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이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학기 내내 강의실에는 빈손으로 들어가니-오해는 마시라, 강의안은 미리 가상강의실에 올려두고 프레젠테이션도 한다. 내가 교재나 강의안을 보고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학생들은 비상한 기억력에 찬탄한다. 이럴 때면 나는 국사 선생님을 떠올린다. 그분도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신 것은 아닐테지. 다만 그렇게 외운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교과서의 종과 횡을 엮어 연상과 추론이 유연(柔軟)하고 유연(類緣)한 네러티브를 만들었을 것이다. 왜?
보이기는 잘 외운 것 같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강의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체벌과 강설식 수업에 관해 드는 생각이 있길래 적어 보았다.
(계속)
[출처] 교수법에 대하여 작성자 미운오리
(네이버 블로그에서 옮겨 왔다. 이사 왔다는 뜻이지.)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의아하기만 하지만, 그때 대학 2학년 때 시 쓰기에 가장 열광하던 그때 시 쓰기를 포기했더랬습니다. 내 길이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그 후로 너무 오랫동안 산문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다시 조심스럽게 시 쓰기를 시작하는데, 자의식이 없을 수 없습니다. 비밀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낮은 숨결로 이곳 한켠에 써 둘 생각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되려 보기 어렵겠군요. 다행히 이곳을 찾은 여러분을 빼고는 말이지요.
2008년 5월 3일 토요일
교수법에 대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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